혹시 누각이라는 단어를 들어봤을지 모르겠다.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으로써 이 층이나 삼 층으로 지은 한옥이다. 누각은 연회나 유흥을 즐기는 데에 쓰이는 건물이기 때문에 휴식을 용도로 하는 정자보다는 규모가 넓다.
경남 진주의 상징 촉석루
미국 CNN에서 한국 방문시 꼭 가봐야 할 곳 50선에 선정된 촉석루는 남강변 벼랑 위에 우아하고 위엄 있게 서있는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하여 8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남강과 의암, 진주성과 어우러져 천하의 절경을 연출하며 진주 8경 중 제1경을 자랑한다. 벼랑 위에 높이 솟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촉석루는 전쟁 시에는 지휘본부로, 평상시에는 향시(鄕試)를 치르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 주변 볼거리
촉석루를 보기 위해서는 진주성 입장료를 내고 방문을 해야한다. 진주성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서장대, 호국사,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논개 남강 의암 등이 있다.
(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 김시민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며, 왜군과의 2차 전쟁인 1593년 6월, 7만여 명의 민ㆍ관ㆍ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국하였고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껴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 곳이다. )
진주성 내 공북문과 촉석문을 직접 본 적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멋있게 복원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매해 진주남강유등축제도 진행하고 있어 축제 기간에 맞춰 방문하면 드론쇼 및 불꽃쇼도 구경할 수 있다. 먹거리로는 진주냉면, 진주비빔밥 등이 있다.
경남 밀양의 문화유산 영남루
영남루가 최초로 창건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그 전부터 있었던 작은 누각을 철거하고 규모를 크게 하여 개창하였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년)에 실화로 불타버린 것을 1844년(헌종 10년)에 재건한 것으로 평양의 부벽루(浮碧樓)와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함께 3 대명루(名樓)로 일컬어지고 있다.
※ 주변 볼거리
밀양 영남루는 입장료가 필요하진 않다. 밀양강둔치에서 영남루를 바라보면 풍경이 아름답다. 영남루 인근 명소들을 보기 위해서는 차량으로 이동해야 한다.
신라시대 때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된 저수지로 백성들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위양지라고도 한다. 이팝나무 등 진귀한 나무들을 심어 사시사철 아름다운 운치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선비와 문인학자들이 즐겨 찾았던 명소이다. 호박소는 백옥 같은 화강암이 수십만 년 동안 물에 씻겨 커다란 소(沼)를 이루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절구(臼)의 호박 같이 생겼다하여 호박소 또는 구연(臼淵)이라고 한다.
만어사 앞 너덜겅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물고기 형상의 돌들이 널려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그 돌들은 부처영상이 어린다는 산정의 불영석을 향하여 일제히 엎드려 있는 듯한데, 크고 작은 반석들은 모두 경쇠소리가 나며, 이는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돌로 변한 것이라 전하고 있다.
고려 말기의 일연선사도 이 절을 순례하며 영험한 명찰이라고 일컬었을 만큼 유명한 사찰이고 신비스런 경석이다. 먹거리로는 밀양돼지국밥이 유명하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장소 평양 부벽루
부벽루(浮碧樓)는 평양직할시 중구역 금수산 모란봉 동쪽 깎아지른 청류벽 위에 서 있는 정자이다. 본래 393년에 창건한 영명사의 부속건물로서 그 때는 이름도 영명루라고 불렀는데, 그 후 12세기에 이르러 '대동강의 맑고 푸른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정자'라는 뜻에서 부벽루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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